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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라 가즈오의 인터뷰입니다.
번호 82 분류   일반 조회/추천 459  /  127
글쓴이 goodnine    
작성일 1999년 10월 11일 17시 36분 17초
일본의 기록영화 감독 하라 가즈오(1945~)는 두 얼굴을 지녔다. 제 1회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 특별 초청객으로 온 하라는 16일 공식 기자회견장에서는 영 어색하고 딱딱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17일 저녁 일부 기자와 영화청년을 상대로 한 강연회에서 그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열심히 땀을 닦으면서 열변을 토했다. 아마 젊은이들과 자기의 영화를 토론하는 자리가 흥에 겨웠던 모양이다. <씨네21>은 하라 가즈오의 강연이 끝난 뒤 그와 단독 인터뷰를 나눴다.



- 공식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 기록영화를 만든다는 건 점점 어려운 일이 돼가고 있다”고 했는데,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 난 일본이라는 재미없고 지루한 사회에서 그 지루함을 날려버릴 만한 인물을 찍고 싶다.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문제는 그런 인물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전후에 일본이 가난을 벗고 경제적부를 얻기 위한 정책으로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젊은 사람의 재능과 가치관을 빼앗아간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든다. 요즘 젊은이 중에는 힘이 넘치는 특이한 인물을 만나기 힘들다. 젊은이들이 그러니 사회도 활력이 없고 따라서 영화나 문학, 음악도 할 얘기가 없어진다. 일본은 치안도 좋고 분위기가 안정돼 있는 나라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는 답답한 심정을 느낄 때가 많다.



- 그런 숨막히는 일본사회의 질곡을 다룬 작품은 없었나.



= 71년에 만든 첫 작품 <굿바이 CP>가 그랬다. 숨막힌다는 건 막연한 얘기다. 그걸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추구하느냐가 문제다. CP는 일본에서 뇌성마비 장애자들을 가리키는 은어다. 난 이 영화를 찍으면서 뇌성마비 장애자들의 육체를 어떻게 해방시킬거냐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장애자들이 휠체어를 쓰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서 거리로 나서는걸 화면에 담았다. 장애자들이 그렇게 나서기만 해도 일본에서는 경찰이 끌고간다. 뇌성마비 장애자들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자기들의 육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나 같은 기록영화감독은 그들의 노력에 아무 힘도 보탤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육체의 해방을 아무도 지켜보려 하지 않는다. 그걸 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 당신의 이름은 일부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져 있지만 대다수 한국 관객은 당신을 잘 알지 못한다. 아까 말한 대로 ‘힘이 넘치는 특이한 인물을 찍는다’는게 당신 영화의 기본줄기라고 보면 되겠는가.



= 그렇다. 내 두번째 영화 <극사적 에로스>의 주인공인 미유키는 나와 동경대학 시절에 만나 3년 동안 같이 살면서 애도 놓고 한 사이다. 미유키는 나를 만나기 전에도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 이리저리 부딪치는 여성이었다. 어느 날 미유키는 더 이상 남자의 힘을 빌려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난 그를 이해했지만 마음 속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헤어진 지 일년 뒤에 미유키는 나를 찾아와 “하라군, 난 오키나와에 가겠다. 미군기지가 있는 그곳에 가서 여성들과 만나고 싶다. 그곳에서 난 임신을 하겠다. 그리고 자력출산(병원에 가지 않고 혼자 힘으로 애를 낳는다는 말)하겠다. 오키나와에 와서 영화를 찍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난 “찍어도 좋지만 대신 중도하차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찍겠다”라고 답했다.



- 오키나와에 간 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가.



= 70년대는 반제, 반핵, 반전을 외치는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극사적 에로스>에도 그런 시대적 분위기가 배어 있다. 오키나와는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고 그런 점에서 정치적 장소다. 그러나 미유키는 정치적으로 첨예한 위치에 있는 그곳에 서 ‘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간 것이다. 당시 젊은이들의 고민은 그랬다. 기존의 지식과 가치관을 깨부수고 싶어했다. 미유키도 몸으로 직접 그런 길을 닦아 보고 싶었던 것이다.



- 당신의 대표작인 86년 작품 <가자 가자 신군>도 그런 맥락에 있는 것인가.



= 천황을 배알하는 행사 때 누군가 군중 속에서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쏜 사건이 있었다. 그런 배짱좋은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만나보니 대단한 사람이었다. 7시간 반 동안 지칠줄 모르고 혼자 얘기했고 난 그저 “예, 예”라는 말만 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때 뉴기니아에서 싸웠던 오구자끼란 사람이었다. 일본은 그때 뉴기니아에 20만 이상의 병사를 파견했고 10만 이상의 병사가 전사했다. 충격적인 건 오구자끼가 그 당시에 상관의 강요로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구자끼가 뉴기니아에 가서 아직 그곳에 살고 있는 옛 전우를 만나는 장면부터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 오구자끼가 천황에게 알을 던진 이유를 정치적, 역사적으로 물었던 것인가.



= 내 영화에서 일본군이 인육을 먹었다든지, 반제국주의를 담는다든지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질 만큼 배짱좋은 사람의 마음 안에는 어떤 근원적인 힘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오구자끼는 천황을 넘어서는 관념으로 신을 들고 나왔다. 자기는 신이 파견한 병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군’이라는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오구자끼는 내게 일 대 일로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게 인육을 먹인 옛상관을 죽이겠다. 하라군 당신이 그 장면을 찍어라. 이건 오랜 시간 나를 촬영해준 데 대한 감사 표시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들었을 때 겁이 났다. 그때 내가 한 말은 ‘무섭습니다’는 한마디였다. 오구자끼는 그 말을 거절 표시로 알고 실망해서 화

를 냈다. “하라는 얼마나 몹쓸 사람이냐. 지금까지 촬영한 필름을 불태워 버려라.” 오구자끼의 에너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오구자끼는 인육을 먹인 상관의 집에 총을 들고 쳐들어가서 마침 그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아들을 쐈고 현재 징역 12년형 판결을 받고 감옥에 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자 가자 신군>은 일본 기록영화 사상 가장 큰 흥행 기록을 세웠다. 오구자끼는 형무소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 꼭<가자 가자 신군> 2편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내년 여름에 출감한다. 그래서 내년 여름에 2편을 만들까 고민중이다(웃음). 오구자끼는 2편을 만들면 시나리오, 제작, 출연, 감독까지 다 하겠다고 한다.

나는 뭘하냐고 했더니 “하라군, 당신은 카메라만 돌리면 된다”는 것이다(웃음). 그런 사람이다. 이전에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괴짜이고 정말 독특한 사람이다.

난 기록영화를 찍었지만 오구자끼는 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다. 카메라를 전우들쪽으로 돌리면 그는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난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서 참 엉터리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재미있는 것이다. 오구자끼는 그해 일본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가 뽑은 주연남우상 부문에서 2위를 했다. 오구자끼는 형무소 안에서 그 영화잡지를 읽고 굉장히 기뻐했다(웃음).



- 일본 사회에는 이제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는데.



= 오꾸자끼 같은 사람은 이미 60세를 넘겼고 <극사적 에로스>의 주인공 미유끼도 역시 나이를 먹었다. 일본 사회는 70년대를 거쳐 80년대로 오면서 활력을 많이 잃어버렸다. 학생운동 세대라면 실망도 많이 했겠지만 난그렇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그걸 다루는 게 재미있었다. 인간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싸우는 게 무섭고 힘들지만, 싸워나감으로써 자유로워진다. 그걸 여러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보여줘야 하는데 각각의 관계 속에 금기라는게 있고 그걸 깨트리고자 할 때는 찍는 쪽과 찍히는 쪽 모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 자신도 소심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부담을 떠안고 나갈 때 자유로워진다.



- 당신이 그런 생각으로 작업하는 동안 당신의 선배, 동료, 후배들은 어떤 길을 걸었나.



= 오가와 신스케 감독(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산리주카의 나리타에 공항이 건설될 당시 그 지역 주민들과 같이 살면서 투쟁과정을 기록한<산리주카: 헤타부락>을 만든 일본의 대표적인 기록영화 감독)의 이름을 들어봤는가. 오가와는 개인을 상대로 한 게 아니라 권력에 맞서 싸워나가는 집단을 영화소재로 삼았다. 60년대의 전형적인 일본기록영화 전통을 그가 쌓았다. 다루는 소재도 정치적이다. 난 정치적 소재를 부정하진 않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사는 개인에 관심이 많다.

공동체 안의 한 사람을 다루면서 일 대 일로 접근하는 게 내 관심사였다. 그런 가운데 도시문제라든가 농촌해체라든가 하는 그 시대의 문제도 다룰 수 있다. 신스케가 닦아 놓은 기록영화 전통을 어떻게 능가할 것인가가 내 생각이었다. 같은 세대라 해서 같은 문제의식을 나눌 수는 없겠지만 오가와를 따라잡기 위해 개인을 소재로 택한 게 내 세대가 해낸 게 아닐까. 지금 젊은 세대 감독은 잘 모르지만 내 세대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았나라는 생각이다.



- 마지막으로 기록영화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



= 기록영화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찍는 쪽과 찍히는 쪽이 어떤 상황을 만들어가는 게 기록영화작업이다. 극영화에선 절대로 볼 수 없는 상황과 대사가 나오기 때문에 기록영화가 좋다. 그리고 기록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때로는 질투에 불타서 카메라도 흔들리고 하면서 상황을 만드는 나 자신말이다.



#*김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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