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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솔직한 게 미덕이다
번호 2089 분류   일반 조회/추천 775  /  293
글쓴이 미례    
작성일 2002년 03월 31일 22시 45분 51초
살아가면서 나는, 아니 우리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며칠 전 집에서 하은이랑 놀고 있는데
남편이 집에 오는 길에 뭐 먹고 싶은 거 없냐는 전화를 했다.
그런 얘길 들으면 먹고 싶은 게 한 뭉치나 생각이 나서
얼른 대답을 못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행히 이번엔 얼른 생각나는 게 있었다.

회집에 가면 밑반찬으로 주는 바삭거리는 튀김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결혼 전, 우리 교회 신부님 내외와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갔었던 도시락집의 튀김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나는 얼른 도시락집의 튀김을 먹고싶다는 말을 했고,
말을 꺼낸 순간 바삭거리는 튀김은
마치 내가 몇천년전부터 먹고 싶었던 요리인양 눈앞에서 아른아른거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남편과 튀김은 오질 않았고
서서히 지쳐갈 무렵 전화가 왔다.

남편-도시락 집이 없어졌어.
나-그래? 그럼 그냥 와.('어디 다른 데라도 한 번 찾아보지....')

남편-아냐, 내가 다른 데라도 한 번 찾아볼께.
나-아냐, 힘든데 그냥 와.('그래. 꼭 사와. 아유 신나라')

남편-아니. 내가 꼭 튀김 사갈께.
나-그냥 오지 그래...('그럼요. 내가 얼마나 튀김을 기다리는데.)

한참만에 남편이 왔다. 그런데 남편이 사온 것은
바삭거리는 튀김이 아니라 기름이 질질 흐르는 느끼한 튀김이었다.
아... 정말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떻게 안 먹을 수가 있겠는가?
바삭거리지 않고 물컹거리는 튀김을 한 번 베는 순간,
찌든 기름에서 나는 씁쓸한 맛이 한 입 가득 올라왔다.
두개까지는 억지로 먹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맛있지만 밤늦게 많이 먹으면 안된다고 말하며
남은 튀김을 냉장고에 넣어두면서 난 무지 후회했다.
이렇게 말을 했어야 한다.

"난 말이예요, 그냥 튀김이 아니라 바삭바삭거리는 튀김이 먹고 싶거든.
도시락집이 없어졌다면 저기 어화둥둥이나 그런 큰 횟집에 가서
말 좀 잘 해서 튀김만 좀 얻어오면 안될까?"
남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적어도 정확히 요구했어야 했다.
내가 바라는 바를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잘 모른다.
부정확한 요구 때문에 남편의 노력은 부담스러운 노고가 되어버렸다.

말도 안되는 튀김 이야기를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데...
사실 난 지금 엄청나게 허탈하고 좀 화가 났다.
어제 난, 오늘 있을 행사 때문에 밤을 새워서 편집을 했다.
근처 센터에서 일하시던 선생님의 환송회 때 상영될 영상편지였다.
어제 늦게 촬영본을 받았고 오늘 5시 행사에 맞추느라 한 숨도 못잤다.
아침 9시 경에 완성을 했고 6밀리까지 옮기는 데엔 성공을 했다.
그런데 vhs로 영 안 옮겨지는 것이었다.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데크가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두 번이나 테이프를 씹었고, 어렵게 카피를 했는데 화질이 영 아니었다.
나중엔 푸른영상에 가서 카피를 하고 4시 30분 경에 테이프를 넘겼다.

며칠 째 계속 잠을 못자서 하은이는 환송회에 가는 남편이 데려가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달고 조용한 잠을 잤다.
밤 9시쯤 일어나 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에게 영상물이 어땠냐고 물었다.
망설이던 남편은 한참 만에야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내가 아침에 보여줬던 영상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밥맛이 떨어지면서 막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전화를 해보겠다는 나를 말리며 남편은 나중에 조용히 물어보겠다고 했다.

현장에서도 남편이 물었다고 한다.
"왜 음악이 안나와요?"(앞 부분은 인터뷰고 뒤 부분은 뮤비형식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문제가 좀 생겨서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남편은 일이 있어서 나가고 혼자 남은 나는
오래 망설이다가 전화를 했다.
그저 그런 안부 전화처럼 행사는 잘 치렀는지, 선생님은 잘 가셨는지...
한참 뜸을 들이고 있으려니 그 쪽 선생님의 말,
"어떡하지요. 테이프가 안나와서 그냥 8밀리 촬영본을 썼어요.
밤새 수고하셨는데 정말 죄송해요"

괜찮다고, 다시 카피를 해서 드리겠다고
그럭저럭 전화를 잘 끊고 앉아있으려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몰려온다.
1.분명히 확인을 했는데, 그렇다면 그 쪽 비디오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2.내가 현장에서 비디오를 틀어봤어야 했던 건가?
3.졸립더라도 환송회장에 갔어야 했던 건가?
아...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남는 아쉬움은
서로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이런 식의 결말은 아니었을 거라는 거다.
우리 집에서 채 10분도 안 걸리는 그 곳,
비디오가 안나온다는 말을 들었으면 6미리 카메라라도 들고 갔을 터였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밤까지 새운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냥 촬영본을 쓰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어제 밤부터 오늘까지의 내 노력은 헛된 수고로 돌아가버렸다.

일차적인 책임은 작업자인 내게 있다.
푸른영상 비디오에서 잘 나오니 그 곳 비디오에서도 잘 나올 거라는
당연한 생각은 섯부른 속단이었던 것이다.
아... 돌다리도 두들겨가며 건넜어야 하는 것을.
이제 모든 게 끝나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을 이 시간,
난 안타까움과 허탈함에 잠을 잘 수가 없다.
갑자기 떠맡은 편집 때문에 밀린 일들은 산더미처럼 짓누르고 있는데
지금의 이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다.
심지어 난, 오늘 새벽 잠이 깨서 놀아달라는 하은이까지 외면하며
편집에 매달렸는데....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정말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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