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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승헌> 아버님, 김대중대통령께 올립니다.
번호 2172 분류   일반 조회/추천 886  /  297
글쓴이 날적이    
작성일 2002년 05월 03일 12시 36분 05초
그리운 아버님.

갑작스럽게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서 막막한 마음 어찌할 바 모르고 이렇게 두서 없이받을 사람도 없는 편지를 써 봅니다.
사실 지금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 언젠가는 아버님과의 사별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하였지만, 이렇게 아버님을 보내드려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입니다.
아버님이 걱정하시던 제 수배생활이 풀리고, 제가 직장도 가지고 가정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미래의 그 어느 시점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까지 건강하고 건강하셔야 한다고 소원하였는데 말입니다.

아버님을 마지막 본 순간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떠올려 봅니다.
아버지는 그 때도 여느 때처럼 학교로 어머니가 싸주신 밥을 식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시며 오셨습니다. 저는 밥을 먹고, 아버지는 집안 일이며, 세상 돌아가는 일이며, 익숙해 가는 농사일이며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생의 계획이 뭐냐 하시며, 제게 군대는 어떻게 할 것이며, 졸업은 어떻게 할 것이며, 사귀는 사람은 있는지 물어보셨지요. 매번 하시는 질문이셨습니다. 저를 무척 사랑하셨던 아버지. 제 의지와 생각에 믿음을 안겨주셨던 아버지, 그러나 자식에 대한 믿음 한 켠에 자식에 대한 걱정, 가정에 대한 걱정을 쌓아두셨기에 매번 물어보셨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제일가는 걱정이 바로 제 걱정이셨지요. 매번 신통치 않은 제 대답에도 아버지는 연락 자주 해라, 잡히지 말라는 말을 하시고는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98년 말 문과대 학생회 선거에서 학생회장으로 당선되고 나서, 99년 1월 4일 다가올 수배의 올가미를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며칠 뒤 1월 8일은 아버님의 60회 생일이셨습니다. 집을 떠나기 전, 자꾸 마음에 걸려 과일이며, 좋은 것을 집으로 사가곤 했었지만, 저는 끝내 집을 나왔습니다. 3000 문우인 앞에 약속하고 주어진 학생회장 일을
잘 해보고 싶었고, 삶을 열정적으로 대하고,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하는 젊은 청춘의 시기에 수배라는 것이 탄압이라는 것이 옭아맨다 한들 곧 뿌리쳐 버릴 줄 알았기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1년 후 학생회장 임기가 끝나고서도, 그리고 또 남북 두 정상이 만나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통일의 변화가 얼어붙은 한반도를 뜨겁게 녹여내어도, 수배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2000년 8월, 학교에서 준비한 통일한마당 행사에 오셔서는 함께 앉아 행사를 보며, 맥주를 사주셨지요. 그때는 전 사회에 훈풍처럼 불어온 통일 바람에 이제 곧 수배가 풀려 집으로 돌아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이제 통일이 되면, 당신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부모님 속을 썩혀드렸는지, 그 애를 끊는 아픔이 사라지는 날, 바로 그것을 위해 다함께 고생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그 날이 오기도 전에, 수배자의 꾀죄죄한 모습이 아닌 자랑스럽게 웃으며 집 초인종을 누르고 당당히 들어가 아버지 어머니 안아드리려 했는데. 아버지 큰 걱정거리 하나 시원히 풀어드리려 했는데 말입니다. 마음 약해질 때면, 부모 가족 고생시켜가면서 하는 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그
다짐이 한이 되어 가슴에 맺힙니다. 그 한이 다시 다짐이 되어 가슴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사의 비극을 연출한 자가, 우리 민족사의 비극을 빚어내는 바로 그 자들임을 폐부로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버님의 걱정거리 풀어드리지 못한 부끄러운 자식의 원통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 비통하고 절통한 심정을 담아 곧 우리 가족과 민족의 우환거리들에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릴 것입니다.

아버지!
생전에 그러셨듯이 저 하늘에서도 이 아들을 지켜봐 주십시오.
편히 잠드세요.

2002. 5. 2. 아들 승헌 올림

-김대중대통령께 드립니다.

저는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인문학부를 휴학중인 대학생이고 이름은 신승헌입니다. 저는 96년 입학하여 99년 문과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였고, 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수배되어 지금 4년째 수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지난 5월 2일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배자이기에 마음처럼 달려가 가족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습니다. 저와 함께 대학생활을 보내던 친구들이, 선후배들이 이 기막힌 현실에 저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평범한 학생이던 제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바로 이런 눈물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해인 96년 3월 29일 같은 대학을 다니던 법대 95학번 노수석 선배가 시위 도중에 공권력에 의해 돌아가셨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유가족들이, 형의 친지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많은 학우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런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현실의 부당함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운동에 나섰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추모제에서, 열사들의 합동추모제에서 저는 많은 이들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눈물들이 없는 세상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광주 망월동의 눈물이 싫었고, 수유리 419 묘역과 마석묘역의 눈물이 싫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눈물이 싫었고, 이산가족의 눈물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운동에 더 열심히 나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배가 되어 부모님의 눈물을 봐야 했고, 제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금 학우들의 눈물을, 친지들의 눈물을 보아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대학생들의 대표조직인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님께서도 이 국가보안법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형선고까지 받으시면서, 가족들과 주변 친지들과 뜻을 같이 했던 많은 이들의 눈물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금 그 눈물 흘리던때를 돌이켜 보신다면, 그래서 눈시울을 달구던 그 뜨거운 눈물의 느낌을 아직도 잊지 않으셨다면, 아버님을 여의고도 이렇게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는 국민의 한사람, 저의 요구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1.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을 철회하고, 한총련을 합법화하며 모든 한총련 수배자들을 사면복권하십시오.
2. 통일을 가로막고 인권을 유린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십시오.
3. 제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자식된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십시오.

국민의 한사람, 신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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