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선/1993/41분
작품. 내 배로 낳은 새끼마냥 마구 자랑하고 떠벌이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 언제부터인가 징그러운 에미가 되어 오히려 저를 간섭하고 구박하기 시작하더군요. 여러분에게 작품을 내 보이는 오늘가지도 저는, 당당하지 못합니다. 재밌는 작품 하나 만들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겁도 없이 뛰어 들었던 촬영 현장에서 승미와 승호가 마냥 꿈에 부풀어 있지만은 않은 모습은 제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특히 늘 환하고 밝던 승미를 우울하게 만드는 상황들을 저는 매 순간 충격으로 받아들이면서 연출자로서의 역할보다는 승미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친구의 입장에서 촬영에 매달렸던 모양입니다. 촬영이 끝나고... 친구가 아니 연출가로서의 역활만이 온전히 남았을때... 가정의 안정,평화에 자신만만한 자와 자신의 불합리한 희생없이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불안해 하는 자가 그토록 지겹게 싸웠구나, 사회적 통념을 자신의 생각으로 하는 자와 이를 회의하고 부정하는 자가 그토록 피곤하게 다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의하고 불안해 하며 희망을 찾지 못하는 승미는, 결혼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개인적인 관념으로 나약하게 버티고 있는 내 모습이기도 합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는 제가 답을 찾아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끄럽게도 이제 막 현실에 눈 떴을뿐입니다. (40분, HI-8촬영, 베타캠편집)
〈1월 19일〉 어젠 승미네서 잤다. 아침에 순호가 출근하고 승미는 계속 자고 있는 상황을 찍으려고 한것인데 눈을 뜨니 열시가 넘어가는 아침. 순호는 이미 없고 승미도 나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피곤할텐데 더 자라는 승미의 말에 겸연쩍게 웃어주고 나서 승미를 또 따라 나섰다. 동대문 포목점에, 백화점에, 신림동 한복 맞추는 집에... 참으로 재미없는 일들이다. 〈2월 8일〉 카메라를 들고 순호 출근길을 따라나섰다. 순호의 짜증스러운 기색을 의식하며 나도 약간은 조심스러웠는데, 카메라를 들이대어 출근길 시민들의 시선을 모았던 버스안의 소동 이후 순호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비로소 내게 걸어온 말은 '왜 찍느냐' '찍어서 뭘 할것이냐' '왜 하필 우리를 찍느냐'로 이어지는 물음들이었다. 애썼지만 결국 변변찮았던 나의 답변들이 아쉽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것을 물어오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2월 13일〉 한국기자협회 시상식. 승미는 꽃을 한송이 사들고 순호의 입상을 축하하러 갔다. 세종문화회관 내의 넓은 홀. 벽에는 입상한 보도사진들이 죽 걸려있고 환담을 나누며 사진을 둘러보는 말끔한 양복차림의 무리속에 순호도 있었다. 홀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엔 뷔페식으로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동부인해서 오신 사모님들이 조화로왔다. 집으로 돌아와 이부자리를 펴놓고 나서 승미는 오늘 자신이 느꼈던 소외감을 얘기했다. 승미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나 역시 종일 시달리고 위축되어서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2월 20일〉 신부인 승미는 예상외로 이쁘지 않았다. 특히 식중에 조금 울은데다 표정까지 부어 있었으니. 사진 잘 받는 걸 여우같이 알고 있는 승미라 역시 사진 찍을때는 환하게 웃었다. 피로연 할때도 지친 표정이던데 지금 비행기 안에서 내 편지를 읽고 있을까? 승미는 좋겠다. 나는 이제 시작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