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영상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Top
제목 사는 얘기
번호 69 분류   조회/추천 2359  /  372
글쓴이 안미선    
작성일 2003년 10월 11일 02시 42분 16초
링크 - 1
첨부  
송환 잘 상영되었다는 소식 읽었습니다. 저도 꼭 볼 생각입니다.
한 번 뵈어야지, 사무실에 가야지 하면서 늘 맘뿐 도통 시간이 나질 않네요.
제가 살아가는 얘기를 해드릴께요.
저는 9월부터 청소녀 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성매매를 겪었고, 지금은 벗어난 청소녀들과 같이 지내며 돌보고 앞일을 같이 꾸며보는 일입니다.

아침에 가서 우선 "애들아, 일어나자"하면서 목청을 높여 아이들을 깨웁니다. 에이 씨 하고 등돌리는 아이들에게 온갖 협박과 농담을 섞어 깨웁니다. 아침 제시간에 일어나게 하는 게 이 아이들에겐 큰일입니다. 그러곤 아침을 같이 차려 접시 하나에 제각기 덜어 먹습니다. 식사 당번을 미루는 아이들에게 한소리 또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정오가 넘습니다.
저는 간간이 오는 전화를 받고,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갑니다. 갈 때는 박스로 만든 작은 구루마를 탈탈 끌고 가요. 전에 비오는 날 배추 여섯포기 사서 끌고 오다 박스가 사방으로 찢어져 그자리에 쭈그려 앉았더니 그 앞의 오징어 팔던 아저씨가 "사람이 해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냐고" 끈으로 야무지게 칭칭 묶어주어 무사히 집까지 끌고 왔습니다.
티켓다방이나 룸에서 일한 우리집 청소녀들은 대부분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버려지고 학대받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맘속에 부모와 화해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그리워합니다. 자기 같은 딸을 낳지 않겠다고, 꼭 아들을 낳겠다고도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준비도, 각오도 아직 부족합니다. 아이들이 담배 피울 때, 계단참에 같이 쪼그려 앉아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직 그냥 듣기만 합니다. 아이들은 눈치도 빠르고 거짓말도 잘 합니다. 나도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도무지 이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약속은 지키지 않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은 내 속에 있는 열등감과 분노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을 제대로 만나려면 내 속의 분노와 직접 만나야 한다는 걸 느낍니다. 늘 겉돌던 그 한복판에 비켜날 수 없이 정면대결하는 기분입니다. 순간순간의 판단과 감정과, 관심으로 꾸려야할 시간입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떠들고 인사 나누면 맘이 환히 밝아집니다. 꾸밈없고 즐거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현장 활동가 교육을 받습니다. 싫다고 떠난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한 아이의 짐을 쉼터 방침에 따라 그저께 직접 싸서 내보냈습니다. "뭐가 그래 급했어요! 내가 짐 가지러 온댔잖아요" 전화와 성난목소리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방에서 티켓다방 다니다 구출된 아이의 손목에는, 경찰을 기다리며 그어댄 자해의 흔적이 또렷합니다. 임신한 채 구출된 아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몸을 돌보거나 아낄 줄 모릅니다. 남자친구에 매달리지만 수술할 때 되면 남자친구는 돈 한 푼 부치지도, 보러 오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오빠가 돈 부쳐줄 거라고 기다립니다. 아이들 혼자 가지는 꿈입니다. 엄마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자친구에게서 받으려 합니다. 그가 깡패든 업주든, 그 애정의 고리는 아주 단단합니다. 왜 사랑하는지도 물어보아야합니다. 그가 무엇을 충족시키는지, 못다한 부모의 사랑인지, 돈인지, 성욕인지... 성을 그리라 하면 돈과 카드 낙태 감옥 성폭행을 그리는 아이들에게 성은 좋고 따뜻한 것이기도 하다는 걸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래저래 부대끼다 담배를 피고 밤새 아이들 몰래 쉼터에서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을 내가 언제 봤다고, 이렇게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도 축복이라 생각하다가, 이 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날마다 일기를 씁니다. 할 말들이 많은데 풀 시간이 없습니다. 자정께 되어 하루일이 끝나면 친구와 만나고 싶다거나 책을 읽고 싶다거나 글을 쓰고 싶다거나 무언가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이 곳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는 딱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관심을 두었던 성매매 문제를 한복판에서 보고 겪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어떤 형태로든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사회복지사도, 상담가도 아니고 그냥 표현하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강하게 해봅니다.

부산영화제에 가서 '나도 노동자이고 싶다'를 다시 보는데 폐지 줍는 할머니, 나레이터 모델..길 위의 여성들 영상 위로 "한사람, 한사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성들.."이라는 나레이션이 나오자 눈물이 났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냥 한 인간인데, 여성은 곳곳에서 상품화되고 대상화되고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마음들이 억눌려 있습니다. 우리 쉼터의 아이들도 자립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디 공연 하나 같이 보러 갈 때도, 업소에서처럼 진하게 화장하고 남들이 좋아해줄 거라 생각하고 길 나서다, 흘낏거리는 시선과 가슴을 치고 가는 무례한 손들에 시달리지 말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당당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미님 남김   -0001.11.30 00:00   덧말수정 덧말삭제
미선씨,, 나 백영미인데요, 그곳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한가요? 만약 필요하다면 어떤 일을 하는건지 알려줄래요?
  무위님 남김   -0001.11.30 00:00   덧말수정 덧말삭제
제가 사는 얘기를 하면 한없이 가벼운 얘기가 될텐데 미선님의 사는 얘기는 참으로 무겁네요. "그냥 표현하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이란 말이 좀 걸리네요.
  보리님 남김   -0001.11.30 00:00   덧말수정 덧말삭제
작년 봄에 만났던 친구들 생각이 나네요. 아이스크림도 나눠먹고, 식사시간엔 명랑하게 선생님 맛있게 드세요 외치던 친구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을때 보였던 반응들은 꽤나 오랫동안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영등포 하자센터 옆에 ym
  보리님 남김   -0001.11.30 00:00   덧말수정 덧말삭제
ca에서 운영하는 '아하 청소년 쉼터'가 있습니다. 청소년 성교육장인데요. 아이들한테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해 생각해 볼수 있는 시간들이 될 겁니다. 그리구 미선씨... 잘 지내요.
  영미님 남김   -0001.11.30 00:00   덧말수정 덧말삭제
자원봉사할 일이 있다면 해볼 생각이 있어서 물어봤는데요..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내가 그 상처받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받아줄 수 있을까 싶어서... 일단은 미선씨 이야기를 들어보고나서 마음의 결정을 할 생각이에요.
쓰기 목록 추천 수정 답글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