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영상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Top
제목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요.
번호 916 분류   일반 조회/추천 660  /  199
글쓴이 붉은바람    
작성일 2000년 12월 25일 17시 27분 07초
이번 겨울,저는 아름다운 책을 만나고 있습니다.



동아리 동기 녀석이 동아리에 두고 간 책입니다.



중앙대 문창과 강사인 방현석씨가 쓴 책이고,



제목은 '아름다운 저항'입니다.



이미 문단에서도 80년대 민중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는



기대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도청에서 최후를 마친 5월의 노동자들 중에서..



"우리는 이제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며,



개나 도야지와 같이 입을 먹이 그릇에 쳐박아야 하며,



짐승과 같이 살아야만 합니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잔당이 우리를 짐승같이



취급,때리고,개를 죽이듯이 끌고 가고,찌르고,



쏘기 때문입니다.. 80년 5월 김성용 신부의 강론 중에서





2시 30분경,서방 삼거리에서 공수 부대가 쏜 화염방사기에



여러 명의 시민이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살인마들과 살생결단을 내고 말겠다는 치열한 공방전은



날이 저물도록 계속 되었다.



갑자기 유동 삼거리쪽에서 수많은 차량의 불빛이 몰려오



는 것을 본 시위대는 공수여단이 증원된다고 직감했다.



거리는 한순간에 긴장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도로를 가득 채우고 밀려오는 불빛이



운수노동자들의 차량시위대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금남로는 환희의 도가니였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목숨을 담보로 한 투쟁의 시각이 닥쳐왔을때 떠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가 노동자였다.



도청을 접수하던 21일밤과 22일 새벽사이에 전남방직,



일산방직,아시아 자동차,금호고속,전일 섬유,광주어망,



남해어망 노동자들이 드럼통을 굴리며 시가지로 몰려



나왔다.



무엇보다 광주는 모두 한덩어리였다.



없는 것은 단 하나,지도부였다.



거리를 메운 군중들은 누군가 '도청으로 가자'하면



'도청으로 가자'고 따라 외치며 도청으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 가면 있을 것 같았던 지도부는 없었다.



다시 누군가 '전대(전남대)로 가자'하면 또 '전대로 가자'



하고 밀려 갔지만 그 곳이라고 지도부가 있을리 없었다.



23일,정향자(당시29세,여,노동자)는 살아 있는 예수를



이날도 보았다.



노동자 홍비오,



전투에서 가장 용감하던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먹였다.



상무대의 시체 대부분을 도맡아 염을 한 것도 그였다.



그는 이날도 너무 부패해서 모두 코를 막고 외면하는



시체들을 정성껏 수습했다.





시민군이 장악한 금남로에 평화가 왔다.



간첩이 개입하여 무법천지인 폭도들의 도시로 변했다는



관제 언론들의 야비한 모함에도



해방광주는 시민군이 도시를 장악한 5월 22일부터



계엄군에게 함락된 27일까지 닷새동안



단 한건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다.



약탈이 있었던가,절도가 있었던가,매점매석이 있었던가,



'자유'의 완장을 차고 세계의 헌병을 자처하며



광주 민중 항쟁을 무질서로 비난했던 미국땅에서 전기가



끊어진 하룻밤동안 벌어진 추악한 약탈과 야만적 범죄를



우리는 알고 있다.



시청 공무원들의 협조아래 비축미는 공평하게 배급됐으며



앞다툰 헌혈로 그 많은 부상자들에게 수혈을 하고도



피가 남아 돌아갈 정도였다.



그 해 5월 광주는 유난히 더웠지만



정향자는 시민군에게 신김치를 먹인 기억이 없다.



양동,대인동,서방시장 아줌마들이 시장이름이 적힌 팻말을



꽂은 리어카에 쌀을 싣고 왔다.



농성동 사람들은 아예 솥단지를 내걸고



시민군들에게 밥을 해 먹였다.





26일,도청 앞 궐기대회에서 항쟁지도부는



광주와 희생자의 명예회복,민주화 요구가 받아들여지



않을 경우 끝까지 투쟁한다는 입장을 공표했다.



밤이 깊었을 때 항쟁지도부는



여성들을 도청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우리도 남겠다.같이 도청에서 죽겠다.'고 반발한



여성들은 정향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그녀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7일,새벽이 오기 전에 정향자는 도청에 머물렀던



여성 노동자와 간호사,여고생들과 함께 간호복으로 갈아



입고 도청을 빠져 나왔다.



400여 명의 투사들을 남겨둔 도청을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살고 싶은 사람은 집으로 가라'는



항쟁 지도부의 공식적인 권고를 거부하고



항쟁지도부와 최후를 함께 하기로 한 홍비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밟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27일 새벽,



그녀는 광주 시민 모두와 함께 들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요..."



공수 여단의 장갑차 캐털필더 소리만 요란한



새벽하늘을 가르던 애끓는 어린 여성의 절규를 들으며



그녀는 광주와 함께 오열했다.



정향자,그녀가 아끼던 선량하고 아름답던



후배 노동자 홍비오도 수많은 이름없는 투사들과 함께



도청에서 스믈 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면



우리가 싸워 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런 기록을 남깁시다.."














  
쓰기 목록 추천 수정 답글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