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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크리스틴 최의 인터뷰입니다
번호 85 분류   일반 조회/추천 302  /  127
글쓴이 goodnine    
작성일 1999년 10월 11일 17시 45분 15초
재미영화인 크리스틴 최는 미국내에 아시아계 영화의 존재가 미미하던 70년대부터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아시안-아메리칸 영화의 제1세대를 형성해 온 여장부다. 아사히신문이 주최한 제2회 아-태포럼에 참석하기 위해한국에 온 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동양계 소수민족과 여성문제를화두로 삼아온 자신의 영화작업을 진지하게 소개했다.



= 당신은 아시아계 미국인 영화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자신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달라.



- 나는 독립운동하던 한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국, 홍콩, 한국, 미국 등지에서 살았지만 어디서나 이방인이었다. 배경이 복잡하고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어서 자연히 예술에 흥미가 많았다. 14살 때 미국으로 가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건축, 도시계획 등을 공부했다. 베트남전이 끝나자 대학사회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TV나 영화는 동양인을 제대로 보여주는 적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누가 촬영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꿈만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74년‘뉴스릴 조직’에 가입해서 낮에는 건축사로 일하고 밤에 영화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동양인, 특히 여성 영화인은 이상하게 보일 때라서 날더러 '미쳤다’고들 했다. 75년에 조직 이름을 ‘제3세계 뉴스릴’로 바꿨다.

제3세계라는 명칭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다른 소수민족과 연대해서 영화작업을 통해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해 주체적으로 발언하자는 것이었다. 중국이민자에 관한 이야기인 <못에서 축으로>(from spikes to spindles)가 좋은 평을 얻어 TV에 방영되었고, 에서 프로듀서로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발견된 존재가 돼서 기분이 좋았었다. 라는 제목으로 아시아계 5개 민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었는데, 연구도 되어있지 않고 45분짜리 프로그램에 한꺼번에 다루기에는 무리라서 곧 그만두었다. TV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독립했다. 독립영화는 돈이 없어서 문제이지, 길이와 주제 면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 당신을 일생토록 그러한 개척자로 내몬 힘은 무엇인가.



- 65년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해마다 2만명 가량 이민이 증가했다. 그 이유를 몰랐는데 10년 뒤에 보니까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인력부족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뉴욕의 의류산업을 위해 한국, 대만, 홍콩, 필리핀 등지의 숙련된 여성들을 데려다 값싸게 활용했다. 그들이 당하는 차별을 보고 이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었다. 나의 초기 영화는 모두 이민자 또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베트남전을 다룬 요리스 이벤스의 영화를 학교에서 보았는데 그 체험은 내 사상을 바꿔놓았다. 학교의 선전은 거짓이었고 베트남사람들이 패배한 것도 아니었다.



= 당신이 관심을 갖는 주제는 무엇인가.



- 앞에서 말했듯이 소수민족, 여성, 아시아인 문제이다.



= 영화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나 자신의 예에서 보듯이 영화는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를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을 발전시키는 잠재력이 있다.



= 미국의 주류영화와 아시아계 영화의 차이점은.



- 72년 이전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가 없었다. 학자도, 영화도, 분석도, 연구도 없었다. 72년 이후 대학생들이 ‘우리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했다. 나이많은 생존자들을 방문해서 영화를 만들고 책도 썼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내부의시선

’으로 동양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의 영화는 바깥의 시선일 뿐만 아니라 전혀 사실적이지 않았다. 아시아인은 전쟁장면이나 창녀얘기로만 나왔다. 그래도 할리우드의 영향은 많이 받았다. 특히 시장배급면에서 그랬다. 그들로부터 천천히 기술을 배워, 동양인의 이야기를 동양인이 쓰기 시작했고, 촬영, 연기, 배급 등도 모두 직접 해나갔다.



= 당신은 아시안-아메리칸 영화의 1세대지만, 중국계 감독들이 세계적인 인기는 먼저 얻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중국영화가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82년 웨인 왕이 1만달러를 들여 만든16mm 흑백영화 <챈이 사라졌다>에서부터다. 미국이 싫어서 사라진 한 사람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탐정소설 형식으로 구축한 데다 필름누아르장르처럼 찍었다. 더욱이 영어로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자막 읽는 것을 싫어한다. 그 뒤로 피터 왕, 데이빗 헨리 황, 맥싱 홍 킹스턴 등이 뒤를 이었다. 일본인, 필리핀인들도 등장했다. 그러나 내가 만든 <미시시피 트라이앵글>이 82년 베를린에서 수상했는데 동양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최고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 코메리칸(한국계 미국인) 영화들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



- 내 기억으로는 80년대까지 한국계 영화인이 없었다. 65년에 이민온 사람들의 자녀들이 82년경부터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했다. 그들 새로운 세대들이 20년 뒤에야 이민자의 역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대실 김이나 일레인 김은 어떤가.



- 그들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제작자 또는 학자 겸 작가이다.

젊은 세대들, 예컨대 박혜정, 김학순, 오명훈, 이승무, 그레그 박, 김소영, 헬렌 리 등이 좀더 나중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화는 좋았고 표현이 비전통적이며 용감했다. 그러나 성숙도나 섬세함 면에서 보자면 아직도 질은 중등에 속한다고 본다. 아무래도 많이 해봐야 되는 것이니

까.



= 남북한을 배경으로 영화작업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



- 80년대 초에 남북한의 영화들이 10~20편 순회상영되었는데, 양쪽 다 선전용이었다. 서로를 “군인과 창녀가 많은 자본주의” “독재자, 살인마” 등으로 비난했다. 83년에 남쪽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무렵에 북한에 흥미를 느꼈다. 양쪽에서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북한에 먼저 신청을 했다. 교포가 북에 있는 누나를 만나는 장면을 찍기로 하고 우여곡절 끝에 88년 북한에 들어갔는데 비행장에서만 찍고 더이상 못찍게 했다. 서울로 왔더니 “왜 북한에 먼저 갔느냐”며 한국 정부가 화를 냈다. 들어가기 힘드니까 그랬을 뿐인데 내가 찍은 것을 전부 검사한 뒤에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우스워 혼났다. 그때가 올림픽 직전이라 학생들이 매일 데모를 했는데 그것 찍는다고 나를 더 싫어했다. 그러면서 한국을 대표한다고 민속촌이나 경주를 보여주면서 찍으라고하는데 그건 관광이지 영화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다큐멘터리 <이산가족, 두개의 한국>(Home Apart, two Korea)이 끝났다. 어쨌거나 이것이 89년에 전국방송망을 탔다. 이 영화가 방영된 뒤 한국영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연락해왔고 그들도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시작했다. 그때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Who killed Vincent Chin)도 동시에 진행했다. 돈 때문에 힘들었다. 살인사건에 얽힌 중국인 이야기였는데, 너무 논쟁적인 데다 동양계 여자라는 이유로 아무도 지원하려하지 않았다.



= 코메리칸 영화의 관심이 점차 옮겨가고 있다고 들었다.



- 다큐멘터리에서 개인적인 ‘여정’으로 옮아가고 있다. 그레그 박은 하와이에서 자랐는데 자기 조부모의 이야기로 영화를 시작했다. 마치 여행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찍고 이야기한다. 또 한명 일본에서 온 사람이 있는데, 이름은 잊었다. <오사카 이야기>인데 일본 내에서 소수민족이자 게이인 남자의 이야기였다. 아주 좋은 영화였다.



= 최근 다이아스포리즘, 다시말해 심리적,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 다이아스포라는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민족을 뜻했던 용어이나, 최근에는 현대 이민사회의 분열되고 복합적인 정체성을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있다. 동양권의 경제가 발전하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데다 수송수단이 발전하면서 동양과 미국이 하나의 순환단위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이 더이상 최종적인 정착지가 아닌 것이다. 옛날에는 이민 2세대들이 자기 조국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조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연세대, 이화여대, 그리고 여러 고등학교에서 교환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한국을 더이상 제3세계로 보지 않고 1세계 또는 2세계와 대등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니다.



= LA폭동을 다룬 당신의 영화 <사이구>를 보면 한국인들 역시 백인 우월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 보인다고 지적한 사람들이 있다. 다인종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항상 고심할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 93년 4월29일의 로드니 킹 사건 이전에 한 한국여자가 흑인을 도둑으로 오인해서 총살한 사건이 있었다. 흑인폭동 때 방송에서는 그 필름을 반복해서 틀었다. 미국 정부가 한국인을 이용해서 흑백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인들로서는 일 열심히 하고 다른 동족과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겠다는 소망이 단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드니 킹 사건 이후 어떤 사람은 흑인이나 멕시칸이 더 싫어졌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복합문화(multi-cultural) 사회라는 개념은 중요하지만 매우 복잡한 이슈이다. 미국에서는 다른 민족의 역사나 문화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복합문화는 같이 모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민족의 역사, 언어, 지리, 음악 등을 배워야 진정으로 복합문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교육의 주체인 교사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도전했다. 80년대까지 학교교사는 80%가 백인남성이었다.



= 한국에서 코메리칸 영화들을 볼 가능성은.



- 내 최근작인 <황제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Emperor, 남경학살을 다룬 다큐)를 한국방송공사에서 샀으므로 조만간 방영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아마 5년은 걸릴 것이다.



= 한국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 미국에 가기 전에 김지미, 최은희, 신성일 등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 굉장히 슬펐다. 손수건이 젖지 않으면 나쁘다고 생각들 했다. 그 뒤에는 거의 볼 기회가 없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굉장히 잘 만들어졌다. 미학적으로 뛰어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이 할리우드와 달랐다. 신선했다. 중국 5세대 감독들의 영화나 일본영화는 자주 본다.



= 지금 한국에서는 문화폭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조언을 주고 싶은가.



- 사실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아시아권 전체가 그런 것같다. 냉전이 종식되고 경제가 급상승해서 문화가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베트남, 중국, 대만, 한국 등은 여전히 검열이 많은 것 같다.

미국에서는 어떤 소재든지 영화화한다. 보통 사람, 왜소한 사람도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그것이 미국영화가 세계를 장악한 원인이다. 지금이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이다. 우리 문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중국 5세대 감독들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옛날과 달리 영화 만드는 사람들에 지식인이 많고 사회적인 평가도 높아졌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기술, 교육, 오락, 산업, 금융, 문학, 법률 등을 포괄하는 매우 복잡한 영역이다. 미국에서는 90% 가량이 3년 가량 대학원을 다니면서 MFA 학위를 취득한다.



= 그 외에 하고 싶은 말은.



- 한국 정부가 나를 지원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라고 하면 정말 잘 해낼 수있다. 제목은 <세개의 한국>(three Korea)으로 정해두었다. 남한, 북한, 그리고 미국의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진행·정리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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