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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번호 77 분류   일반 조회/추천 293  /  123
글쓴이 류미례    
작성일 1999년 10월 07일 01시 38분 30초
문득 훔쳐본 경화의 말엔 "삶의 이유, 그것은 외롭지 않는 것"

딱 그 말은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한동안 정호승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집을 끼고 살았다.

편집실에서 밤을 새우다 일이 잘 안될 때

버스에 자리가 났을 때, 그리고 가끔 쉬는 휴일에 멍해졌을 때

자꾸 자꾸 그 시집을 읽었다.

MBC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도 바로 그 말이었다.

외롭다고 느꼈던 것같다.

너무 지쳤을 땐 푸른영상을 찾긴 했지만

그런 반복은 피해야할 일이었으니까.



푸른영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그리고 완성까지의 7일은 아마 내 생애 가장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PD의 냉담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막바지 작업,막막함...

그리고... 금요일 7시에 완성하고 대본을 심의실에 넘기고 부슬부슬

비오는 거리를 걸어 MBC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외롭다고 느꼈다.

그리고 혼잣말을 했지. "외로우니까... 그러니까 사람이야..."



그런데 그 뒤로 참 기분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다.

선배 AD들이 내게 술을 사준다고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 PD가 또 저녁을 같이 먹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영상1부의 선배도,

그리고 한 번의 촬영을 같이 나갔을 뿐이지만 따뜻함을 느꼈던 어떤 사람도.



결국 나는 PD랑 저녁을 먹으러 갔고

기다리던 선배 AD들과 영상1부의 선배는 집으로, 당구장으로 흩어져갔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렸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워 나는 외로운 줄 몰랐다.

일요일, 푸른영상 사람들과 함께 했던 밤샘파티도 신이 났고

친구들의 안부 전화,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배려들.



'정산'이라는 게 있다.

푸른영상 총무를 역임했다는 과거에 자신감을 가졌고

그동안 두 번 정도 해봐서 만만하게 보았었는데

프로그램 끝나고 하는 정산은 장난이 아니었다.

10월 4일 자로 확실히 MBC를 떠나서

푸른영상으로 출근할 수 있을 거라는 내 자신감은

갑자기 날아가버리고, 나는 수요일 10시까지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나의 후임이면서 선배AD인 하선호라는 착한 사람이 있어서

오늘 밤에나마 끝냈다.



처음 그 선배가 내게 그랬었다. "류미례, 여기는 학교가 아니다..."

막판 후반 작업을 할 때 나는 CG, 슈퍼(자막을 이렇게 부르더군요), 핸리(이건 특수영상이라고...), 더빙, 종합편집실....그런 수많은 방들을 들락거리며 정말 심하게 좌절했었다. 그 모든 고개에 선배들은 하나하나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왜냐하면 그들도 심하게 바쁘니까)

"처음이니까 그래"라며 다독거리기도 하고(너무 심한 좌절은 피하도록)

"여긴 학교가 아냐"라며 내 무능을 꼬집기도 했다.(안주하지 않도록)

나는 외롭지는 않았던 것같다.



정산을 하고 테이프를 넘기고, 그리고 이 새벽 나는 마지막으로

출연자들에게 줄 테이프를 복사하고 있다.

내일이면 확실하게 MBC를 떠날 것이고

아마 나는 한동안 이 곳을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 말을 주었던 선배들, 그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하고 싶다.

추석 다음날 나를 위해 출근을 했던 CG실의 어떤 차장님,

같은 CG를 세 번 만들며 "저 때문에 댁에 못 들어가시네요" 하며

미안해 하는 내게 "집이 중요한가? 일이 중요하지"라며 쌀쌀맞게 말하던 종합편집실 선배의 기분좋은 장인정신.

10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한숨을 쉬면서도 찍어주었던 카메라맨들의 끈기.

무능에 절망하지 않게, 타성에 길들여지지 않게 말들을 주었던 선배AD들.

셀 수 없이 많은 그들의 말과 마음들이 가슴에 남았다.



어디에 가도 외롭지만은 않은 것같다.

그것은 외로움에 대해서 자신의 몫으로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나, 조금 배운 것같다.

사람에게 기대고, 마음 약하고, 눈물많았던 내게

그들은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아주 다른 말로,

그렇지만 진지하게 말해주고 싶어했다.

그 사람들의 고마움이 가슴에 남는다.



오늘 몇 사람의 선배를 만나서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낯간지러운 말을 참 잘하는 것같다)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외롭지 않았던 4개월이었습니다.

다시 힘있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떤 선배는 쑥스러워하며

또 어떤 선배는 "오바치지 마" 하며 퉁명스러움으로

내 말들을 받았다. 하하



이제 나는 푸른영상으로 돌아간다.

6개의 서랍이 있는 커다란 책상을 나 혼자 쓰며

배가 고프면 밥을 해먹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고,

설겆이하기 가위바위보도 하며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겠지.

은미언니 말처럼 좋은 사람과, 믿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더라.

지치지않고 끈질기게...

들뜨지않고 치열하게...

그렇게 남은 20대를 보내겠다.

(나, 내년이면 서른인데... )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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