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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향기로운 우물
번호 2030 분류   일반 조회/추천 742  /  299
글쓴이 미례    
작성일 2002년 03월 05일 23시 02분 18초
하은이가 가끔 자다 깨서 운다.
나쁜 꿈을 꾸었다고 하기엔 너무 서럽게 운다.
어느 날, 자고 있는 하은이 옆에서 누워있는데
하은이가 '흑흑' 하며 소리없이 흐느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안아주었더니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딸을 이토록 서럽게 하는가?
전생을 믿는 남편은 전생의 기억 때문일 거라 했고
나는....갑자기 자책감에 빠졌다.
내가 하은이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건 아닌가.
내가 편안한 엄마로서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이런 건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8개월밖에 살지 않은 저 아이를
저토록 서럽게 하는 건 무엇인가.

가끔씩 채팅으로 만나는 러시아 언니에게 고민을 말했더니
언니는 한참동안이나 웃음을 보내왔다.
서럽게 우는 건 서러운 기억 때문인 건 당연하단다.
그러나 그 서러운 기억이라는 게
우리가 상상하는 전생이라든지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젖을 빨다 뺏겼을 때, 졸리운데 쉽게 자지 못할 때,
혹은 기는 연습을 하다 머리를 찧었을 때와 같은 것들.
하은이를 서럽게 하는 기억은 바로 그런 것들이라 한다.

8개월의 아이나 서른 둘의 나나 예순넷의 엄마나...
살아온 만큼의 깊이로 기쁨이나 슬픔은 작용하는 것이다.
하은이는 앞으로 점점 더 자랄 것이고
더 깊은 슬픔, 더 환한 기쁨들을 알아가겠지.
내 딸이 세상을 넓고 깊게 알아갔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슬픔, 자기만의 기쁨에만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억울하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누군가가,
제 값이 매겨지지 않는 노동의 댓가로 야위어 가는 누군가가,
천지간에 몸 하나 누일 데 없어 떠도는 누군가가,
강한 자들의 파워게임 속에서 삶의 자리를 위협받는 누군가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우물이 깊으면 물은 차고도 향기롭고
사람이 깊으면 삶은 넉넉해질 것이다.
내 딸이 향기로운 우물같은 넉넉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러려먼 가장 가까이있는 우리 부부부터 좀 사람답게 살아야 할텐데...
아기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인 것같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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