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인권 영화제에서 본 영화 <무명천 할머니>에 대한글입니다.
<레드 헌트> 이후로 독립영화 진영에서는 4.3을 다룬 다큐들이
특히나 많이 만들어져 왔는데, 이 영화도 그 선상에 있다. 4.3 당시
총에 맞아 턱을 읽고 50년여를 살아온 진아영 할머니(84)를
필름에 담음으로써 4.3의 진상을 폭로하는 의도인 것 같다.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계몽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생각지는 않나'고
질문을 했더니, 자신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만든 것이 아니'며
중간 중간에 4.3 자료화면을 넣은 것은 '아직도 4.3을 잘 모르는 관객이
많다고 생각되어'서였다고 감독은 말했다. 더불어 어떤 다른 관객은
'계몽성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물론 계몽성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그 계몽적 의도를
어떠한 설득력 속에 놓는가이다. 저번에 '삶이 되는 다큐'란 글을
쓴 뒤에 다큐에 대해 더 생각해봤다. 그 결과로 다큐의 또 다른
순기능이 '일상 속에서 역사성을 정립'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개개인의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역사적 맥락을 포착한다는 것.
포토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가 공유하는 기능이다.
이렇게 보면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상당히 유물론적인 매체인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상 속에서'란 부분이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할머니의 얼굴과 4.3 때 찍힌 자료화면을 대비시키면서, 건조한
나레이터의 설명으로 억지로 역사성을 끼워넣는 것은 다큐를 다큐답게
찍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식의 대비는 굳이 돈들여서 필름으로 찍을
것이 아니라 사진기로 찍은 사진과 자료사진을 같이 나열해 사진전을
열거나, 책으로 내는 것이 더 낫다. 우리가 굳이 동영상을 고집해야
하는 이유는 연속된 필름이 아니면 포착하기 힘든, 일상성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다. 생활과 동떨어진 역사는 박물관의 역사이다.
다큐가 잡아내는 역사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사실 이 작품은 무척 감동적이다. 진아영 할머니가 무명천으로 가린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을 때, 가슴을 쥐어 뜯으며 옛기억에 몸서리칠 때
관객은 동요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역사를 읽을 수는 없다. 한
인간의 비참한 현재만을 볼 뿐이다. 역사는 가슴저미는 감동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널려진 객관적인 연속성 속에서 찾는 것이다.
1999. 11. 28
글을 쓸 때, 그러니까 평을 쓸때 항상 답답하게 하는 것이
난 만드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 결국 말만 많은 제3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실랄한 비판을 가하지만
사실 독립영화판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판하는 것이 마음에
편할 리가 없다.
그래서 구체적인 대안을 생각해보게 되는데, 마침 이 영화는
나름대로 대안이 생각나서 적어본다.
영화의 시작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스탭들이 할머니에게
찾아가자 할머니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화를 내는 장면이다.
거기서 나레이터는 할머니에게 가해진 외로움의 크기를 다시
강조하며 넘어선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열되는 할머니의 생활
습관들,, 방문까지 자물쇠로 꼭꼭 감춘다던가, 사람들과 절대
겸상을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들이 보여진다. 그러고 나서는
내가 지적했던 자료화면이 나오며 '할머니에게 이런 상처를 안겨
준 기억은 무엇이었을까'하는 나레이터의 음성이 따른다.
이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큰 가능성이 무마되어버리는 지점이다.
영화는 4.3이 할머니의 개인사에 직접적인 상처를 준 것이라는
주장은 하고 있지만, 할머니의 그 개인사를 역사화하지는 못한다.
할머니가 스스로 폐쇄적인 삶을 살면서 자신을 은폐하는 것
에서 우리는 4.3의 은폐를 연결지을 수 있다.영화 중에 인터뷰를
위해 얼굴을 비치는 할머니의 친척들, 이웃들은 카메라 앞에서
할머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영화 속에서 이들이 평소 할머니
의 삶에서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다. 4.3 이후 평생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던가 시장에 나가는 것이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라는 표현 등은 할머니의 은폐된 삶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단지 아픈 장애를 지닌개인에 대한 주변의 무관심과는
별개의 문제다. 할머니의 얼굴은 4.3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역사적 유산이고, 그런 할머니에대한 무관심은 4.3의 상처를 애써
잊으려는 의도적 무관심이라 볼 수 있다. 말하려 하면 더 큰 상처를
입고, 그래서 차라리 잊는것이 편한 은폐의 역사, 그것이 4.3의 역사
라는 것.
따라서 카메라는 할머니의 오열을 자료화면과 열결 짓지
말고 할머니의 친척들, 이웃들의 일상에 연결지었어야 했다. 카메라
앞에서 할머니를 이야기 하는 그들의 준비된 표정이 아니라
평소에 일상 속에서 습관적으로 할머니의 존재, 4.3의 존재를
은폐시키는 모습을 담아내었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할머니의 일상은 역사성을 담아낼 수 있다. 그녀의 개인사는
제주의 역사, 4.3의 역사,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999. 11. 29
"남들이 뭐라하든 네 갈 길을 가라!" Karl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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