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투쟁
- 제 3회 노동영화제에 초청하며..
언제나 망각되는 상식을 다시 한번 공유해보자. 영화가 영화 노동
자의 산물이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이름
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노동운동의 입장에 서있는 영
화는 그리 많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한 것인데,
대부분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영화제작의 주체는 동시에 '자본'
이기도 하며 따라서 반노동자적일 수 밖에 없고, 굳이 영화만을 언
급할 것도 없이 자본이 주인인 사회에서 노동의 담론이 엄청난 열
세에 몰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사회적인 현상이기 때문이
다.
그래서 올해도 노동영화제는 맨몸으로 출발한다. 작년에 주어졌던
방송문화 진흥재단의 지원금은 사라져버렸고, 다른 어떤 공공기금
도 노동 영화제에 대한 지원을 약속해주지는 않았다. 후원으로 나
선 민주노총만 50만원의 지원을 결정했고, 결국 노동 영화제는 주
류 영화제 예산의 0.1%도 채 되지 않는 돈을 손에 쥐고 높은 장벽
을 돌파해야 한다.
어차피 예상했던 장애물에 들러싸인채 우여곡절끝에 준비되어온
올해의 노동 영화제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의 현
장을 담아낸 25편 내외의 작품이 준비되고 있다. 작품의 정확한 편
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확정되지 못했던 것은 노동영화제만의 독특
한(?) 개성이기도 한데, 그것은 진행중인 투쟁을 담아내는 비디오
액티비즘 혹은 다큐멘터리 장르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전제작지원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여섯편의 현장 노
동자 영상패의 작품들이 영화제 기간까지 몇편이나 완성될 수 있을
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강의 밑그림이 그려진 지금 시점에서, 올해의 노동영화제 프로
그램에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삶과 투쟁, 그리고 문화와
역사에 이르는 다양한 소주제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약 6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와 섭외과정을 통
해서 확인된 노동영화 진영의 새로운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변화란 바로 노동운동을 주제로 삼은 작품의 숫자가 놀라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새롭게 포괄되는 주제 또한
다양해지고 있으며,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노동자 영화운
동의 성과들 또한 새롭게 재발견되기도 했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대립항을 죽은 개쯤으로 취급하
는 보수 이데올로그들의 상상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지구화와 그에
따른 노동운동의 국제화는 21세기의 국제적 화두로 등장하고 있으
며, 주류 미디어를 거치지않고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활동
가간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가 교류됨에 따라
노동자 영상운동의 정보력은 노동영화제가 시작되었던 3년전과도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도 진행중인 변화의 폭과 깊이는 이미 명백히 확대되고 있다.
퍼블릭 엑세스 구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비디오 액티비스트들이
미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투적 흐름과 결합하여 마치 우리 독립영
화의 80년대와도 같은 왕성한 작품활동을 진행하면서 위성 채널을
활용하는 전국 네트워킹의 꿈을 서서히 현실화시키고 있는가 하면,
3년전 인터넷과 비디오를 아우르는 일종의 노동 미디어 센터를 설
립한 터키의 활동가들은 상영과 배급과 제작의 사이클을 조직하면
서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상하고 있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이 변화의 한 양상은 예상치 못한 출품요청의 쇄도였다. 듣
도 보도 못했던 작가의 작품들이 특히 상영작 선정의 막판에 인터
넷을 통해 쏟아져들어오는 바람에 영화제측은 예의바른 거절을 위
한 적절한 표현을 찾기에 골몰해야 했다.
물론, 노동자의 삶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 모든 작품들이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거나, 언제나 포괄적인 관객층을 대상으로 삼고 있
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입장에 서고자 하는 영화들이 흔히 지니
는 자본과 기술의 한계는 몇몇 작품에서 기술적 완성도가 기대에
못미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일부 작품들은 한편의 영화로서
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캠페인을 위한 매개역할을 하기 위해 제
작되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이 영화가 할 수
있는 강력한 역할중의 하나이지만)
제3회 노동 영화제는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제작방식이라는 씨줄
과 주제의 성격이라는 날줄로 엮어내며 포괄하고자 한다. TV 방영
물, 극장용 영화로부터, 퍼블릭 엑세스 채널의 주간 프로그램, 그리
고 현장에서 어려운 시간을 쪼개서 틈틈이 제작활동을 하는 노동자
영상 동아리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노동영화의 존재방식은 다양하
며, 미래는 이러한 전문가와 평범한 노동자의 영상활동이 어우러지
는 미지의 조화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배경으로. 제작
방식의 씨줄은 주제의 날줄과 겹쳐지며 프로그램 편성의 원칙을 만
들어낸다. 노동자의 문화, 지구화의 과정에서 가장 극심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생존
을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노동자의 자주관리 시스템,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그에 대항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 등, 힘겹지만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자 하는 노동자의 삶은 여러 층위에서 표출되며
그것을 담아내는 영화운동가들의 노력 또한 집요하다는 것을 3회
노동영화제는 최대한 반영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노동영화제는 관객이 각각의 작품을 각각의 씨줄과 날줄이
겹쳐진 맥락에 따라서 평가해주기 바라며, 섣부른 완성도에 대한
집착으로 치열한 삶의 단서들을 망각하지 말기를 기대한다. 진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통일적으로 사고하고
이미지를 매개로 현실과 인간을 파악하는 영화 본연의 의미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노동영화제만이 제공해줄 수 있
는 특별한 공간인, 영화인과 노동자와 활동가가 함께 머리를 맞대
고 영화와 노동의 현실을 토론하는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촉구한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노동영화를 협소한
브루조아적 영화산업의 맥락을 뛰어넘는 시도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군 또한 영화제의 앞길에서 대기하고 있다.
11월 14일에 있을 노동자 대회와 민중대회의 뒤를 이어 30여명의
전세계 노동운동의 커뮤니케이션 관련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참여하
는 제2회 서울 국제 노동미디어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국제회
의는 커뮤니케이션 전반을 소재로 삼고 있으므로 모든 토론이 관심
의 대상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영화와 관련된 몇가지 주제들
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http://lmedia.nodong.fest) 11개의 워크숍중 특히 독자 TV 채널
확보운동, 국제 노동자 비디오 운동, 그리고 진보진영의 새로운 무
기인 인터넷 스트리밍 워크숍 등은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상당수의
영화들과도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노동영화의 핵심적 주제들
이다.
이렇게 노동영화제는 준비되고 있다. 어차피 '노동'을 화두로 삼고
있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뢰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패션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문화의 흐름 속에서 묻혀버리기 십상이지만, 영
화와 현실의 관계맺음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노동영화제의
문은 말 그대로 활짝 열려있다. (주최측에게는 치명적인 전통이 되
어버렸지만, 노동영화제에는 입장권이라는 개념이 없다)
새로운 천년에 대한 상업적 수사가 난무하는 흐름에 동참하고 싶
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21세기를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
는 이들이 세기말을 반성하며 보다 나은 밀레니엄을 꿈꾸는 축제의
장을 열고자 한다면, 노동영화제는 그 축제의 하나가 되고 싶고 감
히 그 중심에 서고 싶다. 영화와 현실을 함께 끌어안고 우리가 함
께 걸어가야할 작은 주춧돌의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함께하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고, 치열하지만 즐거운 축제의 중심에 서고 싶다.
묵묵히 일만하고 주는대로 받는 무력한 일상을 극복하기 위해, 그
리고 다가오는 세계 체제의 또다른 위기를 파국이 아닌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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