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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발 까마귀
 작품정보 : 오정훈 / BETA / 72분 / 1997년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부문 출품

 

#.기획 의도

박노해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엄혹한 70년대 중반과 80년대를 노동자로, 시인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혹사당하며 모진 생명 줄을 버티며 하루 하루를 지내야 했다. 텁텁한 공장에 환풍기 하나 달기란 하늘의 별 따기고,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공장 담 벼락 한쪽 구석에 묻어버려야만 하는 노동자의 신세. 그러나 이보다 더한 아픔은 노동자라는 이유로 인간의 자리를 빼앗기고 무시당하는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추석 보너스 5만원에 거리로 나서며 동료 노동자와 싸우며, 기름때로 번질거리며 곰팡이에 절어 너덜거리는 벽지를 찢으며, 그는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권리를 찾기 위한 길로 들어선다. 동료 노동자의 연예 편지를 대신 써 주는 것에서 조직의 무기로 활용되던 글쓰기가 자기 반성과 참담한 노동자의 생활을 시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가슴 속에만 담고 있기에는 그가 겪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통해 처절한 현실과 노동자의 슬픔, 희망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이러는 사이 그는 어느 새 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문학가로서 서 있다.

이론에 목마르고 취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살면서 문학가로서 노동자로서 조직운동가로 삶을 살려고 했던 그는 지금 '신문지 네 장 반' 위에 있다. 사회운동에 대한 좌절의 경험과 정치적 대안의 부재 속에 90년을 보내고 있는 시점에 닫힌 현실을 열어 줄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 노동현장을 떠난 후 詩와 잠시 이별을 선택한 그가 '참된 시작'이란 시집으로 다시금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노해를 보는 우리들의 시각은 사뭇 차이가 있는 듯하다.어떤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 움츠리고 있는 노해와 패배를 패배시킨 목화꽃 노해를 만나고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제 열려진 세상을 꿈꾸는 것을 포기한, 투쟁성을 상실한 노해라고들 한다.

넓어진 공간, 조여오는 그물사이를 비집고 나가려는 사람들, 현실의 문제의식은 높지만 아직까지 녹슬어 있는 우리들의 생활 그리고 생존의 조건들, 어쩌면 우리는 노해를 잊으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90년 이후 변화한 우리들의 모습 즉, 변모된 노해가 아니라 변화된 우리들과 시대의 좌표를 만나는 것이 두려운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들은 겨울나무에 서 있는 노해를 통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것을 기억하고 꺼내 보아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

 

#.작품내용

이 작품은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구속되어 현재 경주교도소에서 무기징역으로 수감 중인 박노해에 관한 작품이다.

박노해 시인의 세 권의 책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우리에게 박노해의 변화뿐만 아니라 세월의 변화를 알려준다. 노동과 민주가 중요한 시기였던 80년대, 가는 실낱같은 희망을 갈망하던 시절, 그리고 이제 다시 '사람'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대.

이러한 시대 변화와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박노해는 때론 서정으로 때론 경구로 끊임없이 현실과 부딪히는 자신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다. 섬유 철강 노동자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박노해는 안남 운수 정비사로 그의 탁월한 조직력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이 나오고, 그는 수배를 받게 된다. 1991년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선고를 받으며 삶에 대한 애착과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다시금 절감한다. 지금은 경주교도소에 갇혀 있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박시인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동지의 생활을 통해서 박노해가 갖는 형상과 의미를 관찰적으로 그리고 있는 {세 발 까마귀}는 어떤 정답보다 여러 개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박노해 시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 것인가 ? 혹, 스스로 풀려고 하지 않고 그에게서 시대 대안과 자신의 삶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아니면, 자신의 변화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박시인만은 변치 않기를 냉혹하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에서 개인적 가치를 중요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나'는 어디에 있는가 ?

 

#.연출 이야기

87년 스무 살이던 해, 나는 막걸리 집에 앉아 선배들의 이상한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저 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으로 시작하는 '새' 였다. 그 때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단지 답답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멜로디와 가사 때문이었을까 ? 선배들은 내게 박노해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문학에는 문외한이라고 대답했다. 용비어천가나 관동별곡이라면 또 몰라도.....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는 듯한 선배들의 의아한 표정과 눈치에 약간의 오기가 발동했고, 나는 선배가 던져 준 {노동의 새벽}을 읽기 시작했다. 놀라움이었다. 이제까지 살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노동자라는 단어는 생각이 편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인 줄 알고 있었던 내게 그 시집은 충격이었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갖는 감수성을 공감해서일까 ? 아니면 생경한 단어와 비참한 현실 상황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 처음 박노해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어두컴컴한 하숙방 바닥에 엎드려 세상과 대면하게 하고, 어떤 삶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1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세 발 까마귀}와 마주 대하고 있다. 아니,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있다. 박노해를 찾기 위해 지난 3월부터 약 9개월 동안 박시인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옛 동지를 만났다. 조금씩 박노해를 알아나가는 과정이었지만 그의 그림자만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어떤 한 사람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 박시인의 탁월한 조직력과 강한 흡입력, 그리고 시대와 끊임없이 부딪혀 나가는 그의 태도를 존경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박시인의 섬세하며 강한 모습이 곧바로 자신과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무언가에 기대감을 갖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를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리게 한다. 내가 처음 가졌던 박시인에 대한 기대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답답하고 모호한 생활을 해결할 뚜렷한 방향제시가 없는 상황에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시대 중심에 서 있는 박노해를 통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시대 변화와 박노해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정리하다보면, 나 스스로도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막상 작업이 진행되었을 때, 박노해에 대한 이해도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히려 내가 갖는 기대감은 스스로의 위치와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박시인이 말하는 '노동'과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것은 감옥에 있는 박시인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내게 반성의 거울이 되었다. 박기호 신부님의 이야기대로 '감옥에 있는 사람이 나와야 사회가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아름다워짐으로써 감옥에 있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희망을 얻어내기 위해 끝없는 절망 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작은 빛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박시인이 말하는 개인의 모습은 바로 이런 삶의 자세이다.

처음 내가 박시인을 만난 스무살, 그리고 지금 서른 살. 작업 도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읽으며 두 눈 아래를 축축이 젖혔다. 그 눈물은 '나의 문제'였다. '살아가고 있는 나', '살아야만 하는 나' 로 부터 시작하였다. 박노해라는 話頭는 감옥에 갇힌 한 사람의 양심수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모든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나는 길은 바로 박노해를 찾으러 떠나는 여행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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